[한겨레] 사람 향기 나는 시장 / ③ 서울 방학동 ‘도깨비시장’
‘파격세일, 바자회, 원산지 표시제….’
백화점에나 어울릴법한 이런 단어들이 서울 도봉구 ‘방학동 도깨비시장’의 상인들에겐 낯설지 않다. ‘흥정, 덤, 떨이’와 같은 재래시장 특유의 문화까지 어우러졌다. 추석 등 대목경기를 만나면 하루 2만여명이 몰려 물건을 사려면 번호표를 받고 줄서야 한다는 시장골목에는 요즘 저녁 찬거리며 생활용품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여전했다. 25년여 전, 노점상 단속 공무원들을 피해 저녁시간에만 ‘번쩍’ 장이 섰대서 ‘도깨비시장’이란 이름을 얻은 이곳은 인근 대형마트들과의 경쟁을 이겨낸 대도시 골목시장의 대표격이 됐다.
■ 상인들은 어떻게 뭉쳤는가= 상인들이 ‘마트와 맞서보자’는 결의를 다진 시점은 2004년께이다. 서울시 지원을 받아 골목에 지붕을 씌우는 아케이드 공사를 마쳤지만, 이후에 석달여동안 하루 유동인구가 700~800명선에 그친 터였다. 상점가조합에서 설문지를 들고 찾아다니며 의견을 모아 매주 3일씩 할인행사를 벌이는 관행을 만들었다. 오후 1시부터 8시까지 중앙통로에 이동식 판매대를 설치하고, 마진을 대폭 낮춘 특가상품을 내놓는 방식이다. 과일가게 ‘푸릇파릇’의 김명호 사장은 “과일, 정육, 야채 등 품목들을 시간대별로 파는데 대파 2천원짜리가 500원, 돼지고기 600g이 500원 정도”라며 “싼게 비지떡이란 느낌을 주면 홍보에 역효과가 나는 만큼 품질에 더 신경을 쓴다”고 설명했다.
지난 2005년 추석엔 상가마다 18만원씩을 걷어 대형마트처럼 할인행사 알림 전단지를 돌리고, 가수를 초청하는 행사까지 벌였다. 떡집에선 떡이, 과일가게에선 과일이 동이 날 정도로 손님이 몰리는 걸 경험한 상인들은 자신감이 붙었다. 연휴 뒤엔 가게마다 한두 궤짝씩 물건들을 추렴해 감사세일까지 벌였다. 지금도 방학동 도깨비시장은 100여명 상인들이 번갈아가며 수·목·금요일에 할인시간대를 운용하고, 한해 대여섯 차례 ‘바겐세일’ 행사도 벌인다.
■ 주민들 마음을 붙들다= 시장 판매대에 쌓인 토란, 들깨, 이면수어 등 일부품목에 ‘중국산’ 또는 ‘러시아산’이라고 명기돼 있다. 2005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원산지 표시제는 재래시장 물건을 미덥잖아하는 젊은층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이다. 상점가조합의 윤종순 이사장은 “처음엔 중국산 꽁치를 국산이라고 붙여놓은 가게와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다”면서 “지금 표시제 도입상가가 70% 정도지만 곧 완전히 정착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 곳곳에 노점상들이 남아있는 것도 눈길을 끈다. 동편과 서편으로 나눠진 통로 입구나 약국, 금은방 등 물건을 길에 내놓고 팔지 않는 가게들 앞에는 노점상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노점상 출신 과일가게 사장으로 88올림픽 당시 상계동 철거민이었다는 김진홍씨는 “국거리 야채들을 알뜰히 손질해서 한주먹씩 파는 노점 할머니들은 대량 판매하는 점포의 허점을 메워주는 분들”라며 “노점상들도 하루 1000원씩 회비를 낸다”고 말했다. 방학동 도깨비시장은 동네 경로잔치 때는 시장에서 쓸 수 있는 만원짜리 상품권들을 ‘협찬’하고, 부녀회나 시민단체에 바자회 공간을 내주기도 한다.
토박이 상인들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눈길도 따뜻하다. 친구와 함께 장을 보러 나온 이금순(40)씨는 “얼굴 보며 파는 상인의 물건이 마트 물건보다 싸고 믿음직한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글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영상 이규호 피디 recrom295@ne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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