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숭례문, 불타는 민족의 혼.


『 역사의 유물은 자취의 가치만이 아니고

          민족의 혼과 민족을 대변하는 그 자체이다 』


어제 밤 우리나라의 국민이면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국보 1호인 숭례문(남대문)이 불에 타는 모습을 보고 마음 아프지 않은 이들이 어디 있었으랴.


역사를 보존하는 것은 그저 옛 물건의 가치가 중요해서가 아니고 민족의 삶과 민족이 이어져 나온 혼이며 또한 언제 까지나 이어져 나갈 바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족의 혼이 담긴 유물을 보호하고 가꿔 나가는 것이야말로 후손들이 지켜야 할 의무인 것이다.


이러한 유물을 많은 사람들의 눈앞에 잘 있다는 것으로 관리를 소홀히 한다면 어제 타버린 숭례문의 화재가 또다른 유물에서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우리가 보존하고 길이 남길 유물은 우리나라 전체의 것이지 유물이 위치한 지역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유물의 관리는 행정구역을 관리하는 관계 기관을 떠나서 한곳에서 집중 관리하는 체계가 갖춰져야 하며 다시 이러한 슬픔이 일어나기 전에 국보 1호 숭례문의 소실을 계기로 한곳에서 집중 관리하는 일원화 체계를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불타는 숭례문, 그것을 보면서 국민 모두가 가슴 아팠던 것은 숭례문이 우리 민족의 혼이었기 때문이다.


책임의 소재가 어디에 있든, 누가 책임을 져야하건 그것을 떠나서 두 번 다시 이러한 인재로 소실되는 아픔이 더 이상 없었으면 한다.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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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도]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지붕 다포(多包)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며 원래의 이름은 숭례문(崇禮門)이다. 1394년(태조 4) 창건되었으나 지금의 건물은 1447년(세종 29)에 개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이 문은 중앙부에 홍예문(虹蜺  門)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석축 윗면에는 주위에 높이 1.17m의 벽돌로 된 여장(女墻)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夾門)을 열었고, 건물의 외주(外周) 바닥에는 판석(板石)을 깔았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 윗면인 중앙간(中央間)만을 우물마루로 하고 나머지는 흙바닥이다.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머리 [龍頭], 그리고 용마루 양가에는 독수리머리를 올렸다. 이 건물은 특수한 목적을 가진 성문이기 때문에 천장을 가설할 필요가 없어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특기해야 할 것은 이 건물의 지붕형태가 어느 시기에 변경된 것인지 뚜렷하지 않으나 당초에는 평양 대동문 또는 개성 남대문과 같은 팔작지붕이었다는 것이 해체, 수리 때의 조사에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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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 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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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형이신 양녕대군의 어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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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층 평면도]

 조선시대 서울을 한양으로 정하고 그 경계를 성으로 쌓고 성문을 내었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대문(大門)을 내었고 그 사이에 소문(小門)을 내었다. 대문의 이름을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할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따라 지었다. 동대문을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을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을 숭례문이라 하고 북대문은 지(智)를 정(靖)으로 고쳐 숙정문 (肅靖門)이라 하였다. 남대문인 숭례문은 도성 8문 중 가장 중요한 도성의 정문일 뿐만 아니라 교통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숭례문은 태조 5년(1396)에 창건하였으나, 세종 30년(1448)에 고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91~1996년의 해체 수리조사에서 조사된 바에 따르면 성종 10년(1479)에도 비교적 큰 보수공사가 있었다. 서울 성곽은 1907년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이 서울을 방문하면서 비루한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문의 좌우를 헐고 지나간 이후 급속도로 허물어져 나갔다. 따라서 동대문과 더불어 남대문도 좌우의 성벽이 모두 헐려져 나갔다. 그 후 서울의 발달과 함께 도로가 넓혀지면서 몸채만 길 한가운데 남아 현재의 모습과 같이 되었다. 그러나, 남대문은 옆으로 긴 2층 누각의 외관과 견고한 성문, 그리고 직선적인 처마선 등이 조선 초기 건축의 건실함을 나타내고, 새 왕조 신수도의 대문으로서 여전히 당당한 위엄을 지니고 있다. 또한, 후기에 세워진 동대문과는 달리 옹성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방어의 목적보다는 도성의 주입구로서 상징성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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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면도]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정교하게 쌓은 석축의 중앙에 아치형의 홍예문을 뚫고 그 위에 2층의 목조 문루(門樓)를 세웠다. 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상층 외곽의 기둥들을 하층 외곽의 기둥열보다 안으로 들이밀어 세웠다. 내부 중앙에는 4개의 고주가 일렬로 세워져 위층 지붕틀까지 지지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문루 내부의 공간이 앞뒤로 2분되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매우 견고한 구조체계를 이루게 되어 내부의 실용성보다는 구조적 안정성을 더욱 우선했다고 볼 수 있다. 1448년에 다시 세울 때 성곽부분을 높이고 더 웅장하게 만들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2층 지붕은 원래 팔작지붕이었던 것을 후대에 중수하면서 지금과 같은 우진각 지붕으로 개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둥 위에 많은 포작을 가진 다포계 구조를 채택했으며, 현존하는 다포계 건축 가운데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예다. 하층은 내외 모두 2출목이고, 상층은 외3출목, 내2출목의 포작 구성이다. 상하층 지붕 모두 양성을 했고,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용마루 양 끝에는 취두를 장식하여 최고의 격식을 갖추었다.

내용발췌 - 네이버블로그


Posted by 개구리발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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