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엔 세계에서 가장
큰 45.5캐럿짜리 블루다이아몬드가 전시돼 있
다.
일명 ‘블루 호프’라 불리는 그 다이아몬드엔 온
갖 저주로 유명하다. 블루 호프를 소장한 자는
자살하거나 미친다는 것. 과연 그 저주는 사실일
까. 이와 관련 28일 히스토리 채널 ‘역사의 수수
께끼 ‘가 블루 다이아몬드’의 전설을 추적해 눈길
을 끌었다.
블루 다이아몬드는 출처는 명확치 않지만 프랑
스의 보석상이자 탐험가 타베르니에로가 우연히
손에 넣으면서 역사 속에 등장했다. 일각에선 타베르니에가 인도 신상(神像)의 눈에서 훔쳤다는 소문
도 전해진다.
그 후 타베르니에는 루이 14세에게 다이아몬드를 넘겼다. 루이 14세는 수천개의 작은 보석과 타베르
니에가 소유하고 있던 44개의 큰 다이아몬드와 교환했다. 그 중 하나가 67캐럿짜리 블루 다이아몬드
였다.
블루 다이아몬드의 저주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다이아몬드를 처음 손에 넣은 타베르니에는 러시아
여행 중 이리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고, 루이 14세는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다. 여기에 다이아몬드
를 물려받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저주는 계속됐다.
그 후 행방이 묘연했던 다이아몬드는 지금의 45.5캐럿으로 줄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지 23년 후인
1813년에 영국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크기나 모양은 변했지만 보석 전문가들은 과거 루이 16
세가 지니고 있었던 다이아몬드와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나머지 조각들은 커팅과정에서 사라졌
을 것으로 보고 있다.
블루 다이아몬드는 1830년 영국 은행가 헨리 필립 호프경이 9만 달러를 주고 영국 보석상으로부터 사
들였다.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150만 달러에 달한다는 것. 호프경은 자신의 이름을 따 ‘호프 다이
아몬드’라고 불렀다. 그 후 다이아몬드는 호프경의 조카에게 물려졌지만 호프가는 몰락하면서 블루 다
이아몬드의 저주는 여전히 위력을 발휘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모든 저주가 한 남자로부터 시작됐다는 사실. 방송에 따르면 호프가의 몰락 이후 떠
돌아다니던 블루 다이아몬드는 당시 세계적인 보석상이었던 피엘 까르띠에 손에 넘어갔다. 그는 당시
유별난 고객 중의 한 명인 광산업자의 딸 에블린 매컬린에게 블루 다이아몬드를 팔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로 그녀를 속였다.
블루 다이아몬드가 힌두 신의 한쪽 눈이었거나 최초 입수자인 타베르니에가 러시아에서 처참하게 죽
었다는 등 모든 것이 그의 입에서 시작됐다. 또한 마리 앙뜨와네뜨가 목에 블루 다이아몬드를 걸고 다
녔다는 것도 거짓이었다.
실제로 타베르니에는 러시아에서 풍족한 생활을 하다 죽었고, 마리 앙뜨와네트 역시 목에 한 번도 블
루 다이아몬드를 건 적이 없었다. 당시 블루 다이아몬드는 루이 16세 휘장에 박혀 있었다고 ‘블루 미스
터리’의 저자 수잔 스테이넘은 전했다.
보석을 팔기 위한 한 남자의 술수는 성공을 거뒀다. 매컬린은 당시 18만 달러에 보석을 사들였다. 그녀
는 관심을 끌기 위해 더욱 블루 다이아몬드의 소문을 부풀렸다. 매컬린이 가는 곳이면 블루 다이아몬
드가 단연 화제였다. 그녀가 블루 다이아몬드를 착용한 사실은 연일 언론에 오르내렸다. 그런데 매컬
린이 확산시킨 소문은 그녀에게만은 사실로 나타났다.
매컬린의 장남은 9살 때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고, 남편 역시 정신병원에 갇혀 죽어갔다. 여기다 외동
딸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자살했다. 매컬린 역시 일년 뒤 세상을 떠났다. “블루 다이아몬드의 저주가
나에게만은 미치지 않는다”고 큰소리쳤던 매컬린은 결국 다이아몬드 저주의 가장 큰 희생양이 됐다.
그 후 1947년 뉴욕 보석상 해리 윈스턴이 블루 다이아몬드를 구입했다. 그는 공식적으로 부인하다
1958년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기증했다.
일각에선 블루 다이아몬드 저주로 1958년부터 미국인들이 불행해졌다고 주장하지만 전문가들은 근거
없는 믿음이라고 일축한다. 수잔 스테이넴은 “블루 호프의 저주는 터무니없는 얘기다”며 무질서를 두
려워하는 인간이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고 밝혔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