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wer puff님...??? ^^;;
요친님은 참 기억력이 좋으신것 같아요.^^
이집트 상형문자를 젤 처음 해독한 이름... <클레오파트라> 맞구요,
<샹폴리옹>보다 먼저, 영국의 외과의사이자 물리학자인 <토마스 영>이 밝혀냈답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표음문자라는것 까진 생각이 미치지못했지만,
적어도 왕들의 이름만큼은 표음문자일거라는 것에서 밝혀냈죠.
두개의 비문에서 <베레니스>와 <클레오파트라>를 해독해냈는데,
<클레오파트라>가 로제타석에 있는 글자와 같음에 확신을 갖고 상형문자 10 개를 해독해냈답니다.
제가 선물한 요친님본명 상형문자를 보면, 타원형 테두리가 쳐져있지요?
그것은 왕이나 신처럼 아~주 신분이 높은자에게만 둘러진 테두리선으로 일명 <카르투슈>라고 하는데,
<토마스영>은 고지를 바로 눈 앞에 두고 그 위대한 발견 카르투슈라는 테두리안에 스스로 갇혀버린죠.ㅜㅜ
제가 <토마스영>을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다보니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조금만 더...깊이 빠져들었다면... 1200 년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이집트의 비밀을 최초로 밝혀낸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었겠죠~
그는 2% 가 부족했던겁니다!!
요친님 로제타스톤 보신적 있나요?
그 돌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어쩌면 영원히 미궁의 수수께끼로 남을뻔했던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밝히는 귀중한 단서가 되었다죠.^^
역사적으로, 나폴레옹이 이집트원정때 처음 그 돌을 발견했는데, 우째 프랑스에 있지않고,영국에 있을까요?
그리고 영국에서 극비리에 보관했던 로제타석의 비밀이 어떻게해서 프랑스의 샹폴리옹에게까지 전달되어
상형문자의 문법체계를 풀어내게 된걸까요?
거기에 관련된 엄청난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할까합니다. 험험(물한잔 축이고요 ㅋ)
18 세기말 이집트 원정에 나섰던 나폴레옹 군대는 로제타(이집트어로는 '라시드') 마을 근처에서
높이 1미터가 쬠 넘는 신기한 돌쪼가리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죠.
그 돌쪼가리를 자세히 보니,그리스어와 이집트 상형문자가 함께 새겨져있었고,
요거이 뭔진몰라도 심상찮은 물건임을 간파하여 대장에게 즉각 그 사실을 알립니다.
보고받은 대장 역시 고대 이집트 문화에 대해서는 잘은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그것이 심상찮은 물건임을 알아차려 즉시 그것의 탁본을 뜨도록 명령을 내리게됩니다~~
걍 그 돌을 자기네 나라로 '약탈해가면' 되는데도 말이죠.
요것은 우째 생뚱맞게 나왔을까요?
당시 프랑스군은 이집트 원정길에서도 넬슨 제독이 버티고 있는 영국군과 힘을 겨루고 있는 상태였죠.
즉,힘겨루기에서 패할경우 그 돌 쪼가리를 빼앗기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실제로 얼마 지나지않아 프랑스군은 이집트를 영국군에게 양보한 채 본국으로 돌아와야 했고,
그 돌쪼가리는 고스란히 영국군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죠.
그러니 전쟁의 와중에도 번뜩이는 직관력과 탁본을 뜨는 육감은 넘 대~~단 합니다.ㅎㅎ
암튼 샹폴리옹은 바로 저 탁본을 가지고 히에로글리프를 해독해내죠.^^ .
로제타석에는 세종류의 문자가 삼층으로 새겨져 있죠.
맨 위에는 심하게 손상되기는 했으나 이집트 상형문자임이 분명한 문자가(히에로클리프),
그리고 중간에는 이집트 상형문자와 비슷하나 뭔가 좀 달라 보이는 이상한 문자(데모틱),(흘림체임다)
맨 아래에는 그리스어가...... 그리스어 덕분에 내용을 파악할수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 왕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이 새겨져있었다죠.
그리고......위에 내용 역시 문자만 다를뿐 같은 내용이었구요...^^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이집트의 마지막왕조의 5번째 왕인데,
그리스 출신의 왕이 이집트를 재배한 시대였기에 로제타석에는 각기 다른 문자가 새겨져있었던거랍니다.
일설에 의하면, 프톨레마이오스가 그 유명한 알렉산더와 이복형제라 하더군요.(역사책에는 부하로 기록됨)
그의 질투와 라이벌의식은 결국 새로운 왕조를 만들어냈고, 그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돌에 새긴거라고 하더군요.
아참 요친님이 생각하시는<클레오파트라;시저와 안토니우스와 관련된>는 <클레오파트라7세>구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딸입니다.
로제타스톤에 쓰여진 클레오파트라는 동명이인입니당~~ 휴~(급하게 쓰다보니 실수가 많슴다)
p.s.1.이집트가 로제타스톤을 다시 돌려달라고 했지만...
"뺏어간 로제타 스톤 등 돌려달라" 이집트, 영국·프랑스·독일 등에 요구
2005-08-29 12:35:07
"뺏어간 로제타 스톤 등 돌려달라" 이집트, 영국·프랑스·독일 등에 요구 세계문화유산의 보고 이집트가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를 돌려받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이집트 최고유물위원회의 자히 하와스 위원장은 13일 기자회견을 열고 "해외로 빼돌려진 유물을 반환받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한다"고 선언하고 "대부분 식민지 시대에 이집트 정부의 허가없이 유출된 유물에 대한 우리의 반환 요청은 정당하다"고 강조했다. 하와스 위원장은 유네스코(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가 반환을 위한 중재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집트가 반환을 요구한 유물은 대영박물관에 소장 중인 로제타 스톤 등 5점이다.
이 가운데 보스턴 미술박물관의 소장품 앙크하프를 제외한 4점은 모두 약탈당한 유물이라는 것이 이집트 측의 주장이다. 하와스 위원장은 "앙크하프에 대해서는 보상을 고려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집트가 가장 신경쓰는 유물은 단연 로제타 스톤이다. 725kg에 달하는 이 검은 바잘트석(石) 기념비는 이집트 고고학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파라오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로제타 스톤은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과 고고학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프랑스의 고고학자 샹폴리옹은 1822년 기념비에 새겨진 그리스어와 상형문자를 비교 분석해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해 냈다.
이집트의 이 같은 움직임은 이탈리아가 올해 막대한 경비를 부담해 가며 1700년 된 180t짜리 악숨 오벨리스크를 에티오피아에 반환한 것에 자극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유물은 1937년 무솔리니가 약탈한 것이다. AP통신은 14일 "그리스 등 일부 국가가 추진 중인 '문화재 반환 전쟁'에 이집트도 합류했다"고 전하고 "그러나 한 번 양보하기 시작하면 전 세계 각국으로부터 반환 요청이 쇄도할 것이기 때문에 유물 보유국이 유물을 돌려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내다봤다.
이집트는 2003년 이집트 전시를 위해 로제타 스톤의 대여를 요청했지만 이마저도 거절당했다. "매년 5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에게 실망을 안겨줄 수 없다"는 것이 당시 대영박물관 측의 거절 사유였다.
대영박물관의 한나 볼턴 대변인은 13일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세계의 유수한 유물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전 인류에 계속 제공할 것"이라며 로제타 스톤을 반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2005-08-29 12:35:53 수정 윤용준 기자(menson1008@hanmail.net)
p.s.2 그나저나 프랑스가 약탈해간 규장각도서 반환한다고 미테랑대통령이 03님께 합의한적이 언젠데,
아직도 깜깜무소식이네염ㅜㅜ(하긴 죽은자는 말이없죠)
일본 야들도 마찬가지구염~~
이토 히로부미 ‘규장각 도서 수백권’ 100년째 ‘대출중’......
이토 히로부미 ‘규장각 도서 수백권’ 100년째 ‘대출중’
총독부 시절, 1000여권 대출뒤 ‘한일협정’ 빌미 ‘입닦아’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규장각’ 소극적 고문서 관리 공개
“규장각은 이토 히로부미의 도서대출 사실을 40년이 지나도록 침묵하고 있다. 명백한 직무유기다.”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공동의장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 봉선사 주지 철안 스님·환수위)은 10일 “조선왕조실록의 귀환을 환영하며”란 성명서를 내어 “규장각은 약탈문화재 환수운동에 동참하라”고 주장했다.
환수위는 성명에서 “차질없이 실록을 반환받은 서울대에 감사한다”며 “그러나 도쿄대의 기증의사를 신중한 고려없이 결정한 서울대의 태도는 역사의식이 결여된 것으로 남북한 불교도, 일본 동포사회, 국민들의 지지를 통해 진행된 ‘실록반환’ 의미를 퇴색시키고 말았다”고 서울대를 비난했다. 환수위는 “규장각 도서를 이토 히로부미가 강제 반출해간 사실을 확인했고 아직까지 이 도서들이 돌아오지 못한 것을 확인했다”며 “규장각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지, 아직까지 공식 문제제기를 못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직무유기다”고 주장했다. 환수위는 “규장각이 실록을 소장하고 싶다면 민간운동의 성과에 기대어 자기 몫을 챙기려는 자세를 버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대출한 규장각 도서의 환수에 나서야 ‘행동하는 지성, 양심있는 지성’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본다”고 서울대쪽의 자성을 요구했다.
어떻게 알려지게 됐나
1965년 서울대 규장각 도서 정리중 총독부 서류철 조사도중 ‘발견’
이토 히로부미가 규장각 도서를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사실은 1965년 처음 밝혀졌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백린 열람과장이 1965년 규장각 도서를 정리하다가 1911년의 조선총독부 취조국 서류철을 발견하게 된 게 발단이었다. 이 서류철은 규장각 장서를 접수할 당시와 관련된 문서였다. 서류철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으로 가져간 책의 목록과 이를 보관하고 있던 궁내부대신 와타나베가 당시 조선총독 데라우치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한·일 관계사항 조사목적으로 가져온 서적을 ‘궁내성 도서료’에 보관하고 있고 이 책들은 일본의 왕족·공족의 실록 편수에 참고로 필요하며, 일본의 제실도서관에도 없는 것들이니 모두 궁내성으로 양도하였으면 한다”는 내용의 공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토대로 1968년 백린은 〈서지학〉창간호에 ‘이등박문에 대출된 규장각 도서에 대하여’란 논문을 발표하게 된다. 이후 1972년 <서울신문>에 이구열씨가 ‘문화재 비화’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다시 이 사실이 언급되었고 1998년 연합뉴스(당시 연합통신)의 보도가 있었으나 곧 잠잠해졌다. 2002년에는 서울대 국사학과의 이상찬 교수가 기존 백린의 논문에서 틀린 점을 바로잡고 다시 ‘이등박문이 약탈해간 고도서 조사’(2002, 서울대 인문대학 <한국사론> 48집)란 논문을 발표하게 된다. 이 논문에선 백린이 간과했던 총독부의 또 다른 공문(궁내성 공문을 받은 총독부가 이토가 가져간 77종 1028책 중 24종 200책은 양도할 수 있지만 53종 828책은 돌려줄 수 없다는 내용의 공문)들과 이토가 가져갔던 책이 기존 백린의 33종 563책이 아니라 77종 1028책이라는 사실이 새로 드러났고, 한 권도 돌아오지 못한 걸로 알려져 있던 책이 1966년 한일협정 당시 11종 90책 돌아온 사실도 추가됐다. 하지만 이 뒤에도 별다른 조처는 취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환수위와 서울대와의 협상자리에서 우연히 이 얘기가 나오게 된 후로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문제제기 이후 수십년간 당국 논의와 파악 시도조차 안해
논문 쓴 이상찬 교수 “한일 협정으로 인해 문화재 반환 어렵다”
처음 제기된 문제가 아니지만 당국은 전혀 손을 쓰지 않고 있다. 이런 사실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것이 확인됐다. 해당기관인 규장각에선 논문을 쓴 당사자인 이상찬 교수 이외에는 이 사실 자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규장각 부원장인 송철의 교수는 “공식적으로 규장각 차원에서 논의가 된 적은 없다. 자세한 것은 이상찬 교수에게 물어보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조은수 교육·교류부 부장, 김종은 정보자료관리부장, 김윤제 기관연구부장 모두 “잘 모르겠다. 공식적으로 논의된 적은 없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정작 2002년 논문을 쓴 이상찬 교수는 이런 상황에 부담스러워 했다. 이 교수는 “규장각이 나태하거나 직무를 유기한 것이 아니라 1966년 한일협정 당시 “더이상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조항 때문에 선뜻 규장각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기관에서 체결한 조항을 국가기관인 규장각이 깨뜨릴 수 없는 아주 입지가 좁은 상황”이라며 “개인적으로 계속해서 사실을 추적하고 있고 궁내청의 도서목록을 입수해 대조해본 결과 실제로 일본 궁내성에 관련 도서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교수는 “실제로 궁내청에 들어가 책 상태를 확인한 후 규장각의 도서가 확인되어야 공식적인 반환을 요구할 수 있다”며 “오히려 성급한 요구는 일본이 책을 영원히 감춰버리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마지막으로 “책은 꼭 돌아와야 하며 일본에 직접가서 확인하고 책을 찾아오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 궁내성에 반출 규장각 도서 목록 있는 것 확인”
하지만 규장각이나 서울대 차원에서 공식적인 지원과 협의가 있었는지에 대한 물음에는 즉답을 회피했다. 문화재청도 같은 상황이었다. 문화재청도 첫 논문이 나온 지 40년 가까이 흘렀는데도 실태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최근 환수위의 문제제기를 통해 최근 실태조사를 착수한 상태다. 문화재청 강경환 문화재교류과장은 “최근 환수위쪽의 문제제기를 듣고 실태 파악을 하고 있다”며 “그 전에는 이런 사실에 대해 알려지지 않았고 공식논의된 적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일협정 문제가 있어서 정부 차원에서 공식논의가 가능한지도 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화관광부 문화정책국의 노세호 서기관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경우 문화재청이 담당해야 옳지만 이런 문화재 지정이 안되어 있는 도서의 경우 원래의 주인인 규장각에서 반환업무를 추진해야 하는것이 옳다”고 말했다. 노 서기관 역시 “이토의 도서 반출건에 대해선 처음 들어본다”고 말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규장각에서 100년째 이토 히로부미에 대출중인 책들은?
일제시절 일본 궁내성에 반출된 규장각의 1028책의 책 가운데 통일신라시대를 비롯해 조선시대 학자, 정치가, 문필가, 충신 등 인물에 관한 기록과 문집 등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높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최치원의 <계원필경>과 이수광의 <지봉유설>을 비롯해 <퇴계언행록> <충무전서> <우암집> <영남인물고> 등이 두루 포함돼 있다. <동문선> <기재잡기> <만기요람> <청구만록> 등도 목록에 들어 있다. 1966년 한·일협정 당시에는 <우복선생문집> <김충장공 유서> <만기요람> 등의 11종 90책이 돌아왔다. 이상찬 서울대 교수는 “서지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책들이 꽤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책의 중요도를 떠나서 규장각의 책이므로 규장각에 돌아와야 하는 것이지 책의 중요도에 함몰되서 정작 본질을 왜곡시켜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 요크셔친칠라 (2007/01/22 21:23)
초딩때 이집트 상형문자에 대해서 <소년중앙>이라는 월간지에서 읽은 것 같아요.
구체적 내용은 다 까먹었지만...
그나저나 타원형 테두리 아무 것에나 치는 것이 아니군요. ㅋㅋ
뭘 모르면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토마스 영>의 이야기를 접하니 저두 찔리는 일이 많네요ㅠㅠ
로제타스톤 봤을텐데 제대로 본 기억이 안나는군요.
굳이 또 변명 하자면 대영박물관에 워낙 약탈한 것이 많고 볼 것이 많다보니...
누구의 미이라일까요?
특히 이집트관에서는 미이라랑 미이라 엑스레이로 찍어놓은 것 구경하는데만 정신이 팔려서...^^;;
로제타스톤에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을 줄 몰랐어요.
요 오벨리스크는 이집트 어디에서 가져왔을까요?(힌트: 고대 이집트 건축을 보면 알지롱~!)
그리고 같은 돌인데 오벨리스크가 더 탐이 났나봐요. 고것은 가지고 가 콩코드 광장에 세워 둔 것을 보면...
암튼 그대장에 그부하라고 직관력은 대단하네요.
돌에 새겨진 내용은 특별한(?) 내용은 아닌것(?) 같지만
그로 인해 이집트 역사랑 문화에 대한 대부분의 미스테리가 풀렸다고 생각하니 너무 짜릿하네요.
또 요 오벨리스크는 특별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뭘까요?
약탈 문화재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 가끔해 보는데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대영박물관과 루우브르 박물관을 구경하고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어마어마한 약탈에 일단 입이 쩍 벌어졌고 약탈 당한 국가 사람이라면 피가 거꾸로 쏟아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반면에 약탈을 안 당하고 그 나라에 그대로 있었다고 생각해보면
과연 그것들이 제대로 온전히 체계적으로 보전되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로제타 스톤을 예로 들자면 정원석으로 쓰이지말란 법이 없으니깐요.^^;;
지금 북한 문화재들이 중국으로 정신없이 나오는 것을 보더라도
자국에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차라리 약탈 당해 제대로 보존 되고 있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03님은 불어도 잘 모르시는 분이 말만 믿었을까요?
저도 민사재판 치루다보니 죽은 자의 말은 문서로 명확히 해놓지 않은 이상 정말 아무 소용이 없더군요ㅠㅠ
암튼 마음 끓이지 않고 걍 잊어버리는 것이 속 편하더군요.
그나저나 일본에 대출해준 규장각도서는 엄연히 공문이 있는데도 우째 그모양일까요?
오늘도 power puff님 덕분에 몰랐던 사실 여러 개 알게 되었네요.^^*
** Thomas Young **
1773년 영국에서 태어난 영은 1799년 런던에서 외과의사가 되었지만 1801년에는 왕립학교의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빛의 파동론을 세우는데 일찍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특히 1801년에는 빛의 간섭원리를 발견하였다. 그는 또, 에너지라는 말의 물리적 의미를 부여한 장본인이었으며, 영율(Young's modulus)의 주인공이 되었다. 1801년 그는 색수차를 기술하였고 또, 눈에서 색깔의 인식이 망막에 적색, 초록색, 보라색의 세 신경섬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가정하였다. 이 가정은 뒤에 헬름홀쯔(H. L. F. von Helmholtz)에 의해 발전된다. 그는 또,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가 새겨진 비석을 처음 해석한 몇 사람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829년 런던에서 사망하였다.
** 샹폴리옹 (1790~1832년) **
어릴때부터 고대어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던 그는 17세에 이집트 파라오들의 연대기를 재구성하였다. 로제타 석비를 토대로 샹폴리옹은 1822년에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데 성공했다.
아브라함의 이주와 출애굽사건,예수님의 피난 무대가 되었던 이집트는 성서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나라다. 오늘날 회교국가가 되었지만 이집트에는 아직도 많은 기독교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이집트는 19세기 초까지는 역사의 뒤편에 가려져 있었다.이집트의 고대문명을 인류 앞에 다시 끌어낸 것은 나폴레옹과 샹폴리옹이었다.
1817년 3월 초 프랑스 남부의 그르노블에서 한때 이집트를 점령했던 프랑스 황제와 상형문자 해독의 열쇠를 쥔 학자의 극적인 만남이 있었다. 유배지 엘바를 탈출한 나폴레옹은 1천2백명의 근위병을 거느리고 파리를 향해 진격하던 도중이었다. 그 와중에 그르노블대학의 고대사 교수였던 샹폴리옹은 정치가인 형의 소개로 그를 만나 자신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콥트어 사전에 관해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이집트학의 초석을 놓는 정복자와 학자의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어릴때부터 고대 언어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던 샹폴리옹은 17세가 되던 해 `파라오 지배 하의 이집트'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학술원의 인정을 받았고,로제타 석비의 탁본을 갖고 본격적인 상형문자 해독을 시도하였다. 19세에 이미 그르노블대학의 고대사 교수로 발탁되었으나 1821년에는 나폴레옹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몰려 대학에서 쫓겨나고 말았다.하지만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 비로소 상형문자의 해독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게 된다. 샹폴리옹은 먼저 로제타 석비의 그리스어 부분 해독을 통해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라는 두 왕의 이름을 밝혀냈고,상형문자에서 왕의 이름은 반드시 타원형의 카르투쉬 안에 들어 있다는 전제 하에 두 이름을 비교해 중복되는 상형문자들의 음가를 하나씩 찾아내기 시작했다.
1822년 프랑스 학술원의 책임자인 다씨에르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그는 `소리글자인 상형문자 알파벳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1천5백여년동안 인류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있던 이집트 상형문자가 드디어 그 비밀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탐사는 모두 24권에 이르는 방대한 `이집트 묘사'의 출판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고,샹폴리옹의 연구는 그 속에 묘사된 수많은 유적과 유물들의 정체를 밝혀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폴레옹이 고대 이집트라는 보물상자를 유럽으로 가져왔다면 열쇠를 찾아 그 상자를 연 사람은 바로 샹폴리옹이었다. 이 두 프랑스인의 노력에 힘입어 성서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고대 이집트의 문명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